계룡산 수운교 본부 -
"하날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
수운교 본부는 계룡산에서 동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금병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크게 보면 계룡산의 한 줄기라 볼 수도 있다. 계룡산일대는 전북 김제 모악산 일대와 함께 한국 신종교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계룡산은 일찍부터 풍수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일대가 민간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도참설의 영향이 컸다. 계룡산은 신라 이래로 토함산(東嶽), 태백산(北嶽), 지리산(南嶽), 팔공산(中嶽)과 함께 5악(五嶽)중 하나(西嶽)로 국가에서 직접 산악신께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후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 최종적으로 한양을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전란이 일어날 때 살 수 있는 몇 안되는 피난처로도 적고 있다.
이런 도참적 배경 때문에 수운교 본부도 계룡산에서 멀지 않은 금병산 자락에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금병산 주위에는 금병산(360m), 수양산(315m), 오봉산(240m) 등이 중요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대전시 유성구 추목동의 북쪽에서 병풍처럼 둘러싸면서 그 안쪽에 전형적인 숯골(추목)분지를 형성해 놓고 있다. 이 숯골분지에 수운교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수운교본부를 가려면 북대전 톨게이트에서 좌회전을 하여 자운대를 지나야 한다. 자운대는 육군대학교, 해군대학교, 공군대학교 등 군 교육시설이 있는 곳이다. 제5공화국 시절이던 1983년 '620국방사업'의 일환으로 수운교본부가 있는 금병산 자운지구 240만평과 계룡산 신도지구 360만평이 '군사시설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이로 말미암아 계룡산 신도지구 1,200가구와 금병산 자운지구 900가구는 일시에 철거됐다. 자운지구에 신앙촌을 형성하고 있던 수운교인들이 이때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수운교본부 역시 철거대상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운교는 정부의 방침을 수용할 수 없다면서 법적 소송 등 적극적인 대처를 통해 5년이 지난 1988년 수운교 존치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수운교본부는 본전인 도솔천(率天), 봉령각(鳳靈閣), 법회당(法會堂), 용호당(龍虎堂), 장실(丈室) 등 수운교본부의 대전 이전과 함께 건립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건물들은 1930년을 전후하여 세워졌다.
본전인 도솔천의 경우 1928년 상량식을 갖고 이듬해인 1929년 낙성식을 가졌다. 이 건물은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천궁(天宮) 또는 천단(天壇)으로도 불리고 있는 도솔천은 남향한 목조건물로 음양의 원리에 따라 60갑자의 천간 10수를 반영해 기둥이 10개로 되어 있다. 또한 문은 28수에 맞춰 28개이며 작은 용 44마리, 봉황 88마리의 상을 조각하여 용두봉각체(龍頭鳳角體)로 지어졌다. 건축당시 화려한 단청과 건물의 장엄함으로 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 도솔천은 '수운교천단'이라는 이름으로 충남 문화재 자료 3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이래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천궁안의 천단은 수운교의 신앙대상인 '하날님'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금단색의 직사각형 모양이 있는데 하날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좌우에는 적색과 분홍색의 원반형이 있는데 각각 해(日)와 달(月)의 형상을 띠고 있다. 수운교에서는 해와 달은 해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나옹도사와 달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수운천사(이최출룡자.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를 상징하며 두 사람은 하날님 좌우에 있는 시위선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자미성(紫星)과 삼태성(三台星)의 8성(八星)이 있고 동남, 서북의 순으로 4대칠성의 28수 성좌를 봉안하여 모두 36성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천계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천단앞에는 단군, 석가, 노자, 공자 등 4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립초기에는 일제시대여서 단군 위패를 모실 수 없어 해방이 되고 난 후 모셨다고 수운교 관계자는 말했다. 오른쪽 벽면에는 18개의 머리와 36개의 손을 가진 신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수운교에서는 창검과 방패를 들고 불천계(佛天界)를 호령하는 동진보살로 부르고 있다.
천단앞 왼쪽으로는 금강탑, 오른쪽에 무량수탑이 있다
봉령각은 1929년 도솔천궁과 동시에 건축된 건물로 금병산 기슭에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안타깝게도 1939년 화재로 본래 건물은 소실되고 해방이후 당초의 건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자리에 중건했다. 이곳 봉령각은 윗장실로도 불렸으며 수운교를 창도한 수운천사가 별채와 같이 사용하면서 거처했던 곳이다.
법회당은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단의 중앙에 삼불상(三佛像.)을 모셨다. 1934년 8월 조성된 삼불상은 처음에는 천단에 봉안했으나 1936년 법회당 준공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삼불상 왼편에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 탱화가 있고 오른쪽에는 '삼천대천세계도'가 봉안돼 있다. 삼천대천세계도는 1930년 그린 것으로 수운교의 우주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호당은 수운천사가 정양하던 사저로 1926년 지어진 건물이다. 수운교본부에 있는 건물중 최초로 지어졌다.
수운교본부에는 석고(石鼓)라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수운교 신도가 현몽을 통해 얻은 석고는 돌로 치면 쟁쟁 쇳소리가 난다는 것. 현재 '수운교 석종'이라는 이름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수운교는 천도교와 같은 동학계열이지만 신앙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천도교가 의식을 간소화하고 현대화되어 있다면 수운교는 의례나 신앙대상에 있어서 불교와 습합된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수운교는 불교인으로 알려진 나옹화상을 받들고 있고 육식을 피할 뿐 아니라 부처를 봉안하고 있다. 불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조 단군은 물론 노자도 선성(先聖)으로 모신다. 유-불-선 합일을 주장하는 신종교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운교는 교조인 이최출룡자가 수운 최제우와 동일인라고 주장한다. 대구장대에서 살아나 입산한 후부터 스스로 이최출룡자로 이름을 바꿔 행세했다는 것이다. 이후 55년간 은둔 고행하면서 수행에 정진하다 1923년 수운교를 개교하고 1938년 11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고 주장한다.
수운교는 수운교본부가 위치한 금병산이 천명계시에 의해 하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이며 동학이 수운교를 통해 결실할 청정도량(淸淨道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53불 부처님의 강림터라고 믿고 있다. 계룡산 일대에 산재해 있던 대부분의 신종교들은 정부시책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교본부는 대단했던 옛 영화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계룡산일대 신종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글-사진=김형수 기자 kakim@segye.com
<사진>대전 금병산 자락에 자리한 수운교본부 전경. 맨 뒤쪽에 있는 건물이 본전인 도솔천궁이다. 도솔천궁은 구한말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이 지은 건물이다.
( 종교신문,,2002/12/18 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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